[신앙과 과학]
고대근동의 신은 힘의 역학에 따라 군림하는 존재
창세기의 신, 누가복음의 신은 인간과 함께 거니는 존재(인격으로 대우)
이런 신이 세계(힘의 역학)에 어긋난다.
이것이 신을 믿는 이유. 어긋남
■ 매일 예수를 만나야 한다.
(my comment) 그리스도인은 빅뱅, 진화가 아니라, 물리주의와 싸워야 한다.
■ 신앙과 과학은 양립가능한가
현대 신앙인들이 과학을 신앙의 대척점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적이다. = 진리의 기준] 이 되었기 떄문
과학과 신앙의 충돌은 과학과 신앙의 충돌이 아니라, 과학주의자들(물리주의를 전제하여 세계관을 전개하는 해석)과의 충돌이다.
1. 모든 진리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은 데이터, 측정가능한 것만 서술할 수 있다.
2. 과학에서의 지식은 잠정적이다.
언제든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부정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탐구의 태도/방법론에 불과하다.
3.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
과학 자체는 무신론을 지지하지도, 유신론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4.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 과학주의- 리처드도킨슨(과학적 무신론자) 과학으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고 시도, 혹은 가치관, 우주론을 설명
* 읽어볼 것: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우종학교수)
5. 모든 것은 해석에 불과하다 (불가지론자)
- 성서는 객관적 역사가 아닌 '해석된 역사'이다.
- 당시 청자들의 세계관을 고려한 발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 신앙과 신학은 다르다.
고통받는 하나님, 고통의 분담(자기의 백성과 고통을 분담) .... 효과적이지 않다. 비효율적. 낭비.
(사례) 미셀푸코 권력구조: 회장실은 넓다. 문으로부터 회장까지 다가가는데 거리가 필요. 거리감은 권력을 발생시킨다.
작은자로서의 하나님
(my comment)
■ 지식의 근원에 대하여
(잠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
(데카르트)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 우리는 진리의 기준을 어디에 둘 수 있는가
(?) 모든 신앙과 신학이 잠정적이라면, 우리는 진리의 기준을 어디에 둘 수 있는가
- 신앙은 가치관과 우주론을 담는다.
- 과학은 우주론을 담는다.
(?) 신앙이 우주에 대해 서술하는 것은 정당한가
칸트는 신앙(이성)이 우주(물자체)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권한을 넘어선 월권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게 있어 신, 우주, 자유와 같은 단어는 개념(Begriff) 이 아니라 이념(idea), 즉, 순수이성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각(halluciation)에 가깝다.
■ 바른 신앙의 기준: 성령과 공동체, 복음주의 전통 안에 있는가
■ 발생에 대하여
단세포가 분화하여 사람이 된다고 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서 인간 존재가 되는 특정시점을 갖는다.
신이 진화를 사용해서 사람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신이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 신이 지금 이순간 창조를 하고, 우리가 그 순간을 목격한다고 해도, 우리는 신을 발견할 수 있는가?
■ 성경은 백화점이 아니다. 공룡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예수에 대해서도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필요한 내용만 기술되어 있다.
■ 실증을 요구하는 무신론자에 대한 답변
만일 어떤 무신론자가 "이성으로 이해해야만 믿을 수 있다. 내게 증거를 가져오라. 신을 보여달라. 나는 내가 본 것만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불신에 대한 자기 고백'일 뿐, 그 자신이 실제 기적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눅 16: 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my comment) 전도의 어리석은 것으로 전하여 지는 것이 믿음의 구조. 신의 존재는 그를 믿는 자의 존재로 인하여 입증된다. 그러나 그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너무 흐리고 약한 빛이어서, 그것으로 믿음에 다다르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믿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 신앙과 이성에 대하여
신앙은 이성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까?
- 신앙은 가치관이자 우주론
- 이성은 가치관이자 우주론
우리가 성서를 수호할 필요가 없다. 억지를 부리게 된다.
(my comment) 신앙은 선포의 영역이지 설명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신앙을 설명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다.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예배공동체의 회복. 법궤가 들어오지만 영광이 임하지 않는다. 레위 지파들이 찬양을 시작할 때 영광이 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인간
■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하여
성경을 실증적으로 보게 되면 모순이 발생한다.
(my comment)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라면 장르의 한계와 청자의 원청취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비평은 파산했다고 생각함.
■ 모든 지식의 드러냄은 "필요에 따라"(대상과 상황)
■ 찝찝함(불편함)에 대하여 (우종학 교수의 설명)
그리스도인(신앙인)들이 진화론에 대해 갖는 근원적 불편함은
1. 신이 직접 만들어야 진짜 창조라는 오해
2.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장벽
(my comment)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 하나님의 형상은 언제 어디에 임재?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창조인가?
- 예수의 기적: 오병이어(떡과 물고기를 늘림), 나사로의 부활(상태의 변화), 물이 포도주로 변함(상태의 변화)
- 창조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 원죄에 대하여
- 서방교회의 전통적 설명(아우구스티누스): 남자의 정자를 통해 전달, 유전자에 죄성이 있다.
- 진화론은 원죄론과 연관이 되기 때문에 다른 문제를 촉발시킨다.
- 답변: 대표성 원죄론, 아담이 인류의 첫 시조이기 때문에. 아담이 죄의 경향성을 첫 발현한 것이다.
- 원죄론은 인간실존을 설명하는데 탁월하다. 죄의 경향성
(모임에서 논의되지 않았지만, 내 생각엔 연관이 있는 주제들)
* 진화생물학의 문제:
- 마모셋 원숭이의 사례: 마모셋 원숭이는 현재 구석기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짐
- 제인 구달의 침팬지연구 사례: 아프리카 동부 침팬지와 서부 침팬지에게서 그룹간 다른 문화/지식이 발전/전수되고 있는 것을 발견. 상처에 특정 풀을 덮어 치료하는 문화가 전수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짐
* 창발은 가능할 것인가?
- 창조적 발현, 어느 특정 조건이 갖추어 졌을 때, 이전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특질이 새롭게 나타남.
- 황충(rocust) 메뚜기 떼. 일반 메뚜기가 특정 개체밀도수를 넘기게 되면, 호르몬을 분비하며 완전히 다른 개체로 변화됨. 색도 변하고 가슴모양도 바뀌며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흉폭한 상태로 변함
- 영장류에게서 또 한 번 사피엔스과 같이 정신이 출현할 수 있을까?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사피엔스가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았다.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도 있을 수 있다.
■ 결론: 진리는 진실됨(약속이 폐하여 지지 않는다)
- 개개인의 선택이지만, 상대주의로는 빠지지 않는다.
- "신비"에 대해 우리는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 우리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리스도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까지, 여기서 더 나아가면 폭력이 된다.
- 가다머의 '진리의 방법'을 언급. 진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언급. 기투, 주체적 선택을 강조. 실존주의에 공감
- 후설의 현상학을 언급
(my comment)
- 내 생각에 미끄러운 경사 논증, 낙타 등의 지푸라기 논증은 강력하다.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이브한 해석이 아닌가?
- 나는 키에르케고르에는 동의하지만, 가다머/하이데거/현상학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차이.
-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나를 아는 지식'이 가능해진다고 한 말에 공감한다.
- 키에르케고르의 설명으로는,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켜 진리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예수는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를 변화시키는 존재인 것. 현대의 역사비평은 말끔한 정장을 입고 젠체하는 모던보이처럼 보인다. 지식과 진리를 혼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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