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적 변화

어느 자그마한 공장

사장과 두 명의 직원으로 돌아가는
어느 날 한 직원이 공장의 돈이 든 통장과 인감도장을 들고 도망을 갔다.
공장은 점점 더 어려워 지고
날마다 빚쟁이가 찾아와 빚독촉을 한다.

어느날 도망간 직원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왜 그럴까요...?
하나도 맛이 없어요... 혼자 먹는 회는 아무 맛도 나지 않네요..."
"OOO씨, 지금 어디입니까? 어디에요?"

" ...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나를 사장님이 거두어 주셨죠.
그 때는 공장도 일이 많이 들어왔었고 벌이도 어느 정도 됐었죠
힘들기는 했지만,
가끔씩 사장님이 우리를 이 곳에 데려와 회를 사주시곤 했어요
그 때 먹었던 회는 참 맛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돌아가신 뒤에 공장이 기울기 시작했죠.
공장에 점점 일도 안들어오고
너무 마음이 힘들었죠.
사실 다들 힘들었을 텐데..  순간의 잘못으로 돈을 훔쳐나오게 됐어요.
그 일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죽어도 싼 놈이에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곳에서 회를 먹고 죽으려 했어요.

 

그런데... 이 회는 정말 맛이 없네요...
혼자 먹는 회는 정말 맛이 없네요.
그 때 먹었던 회는 참 맛있었는데
왜 그런걸까요.."

사장님이 사주셨던 회와 지금 이 자리의 먹는 회는
물리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바뀐 것은 나.
내가 바뀌었기 때문에
어제의 맛있었던 회는
오늘의 아무 맛도 나지 않는 회가 되었다.

 

기쁘지 않으면 기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기쁜 마음의 내가 되지 않는 이상 내 마음은 기쁠 수 없다.
복 받을 내가 되지 않는 이상 나는 복을 누릴 수 없다.

 

그것은 "누림"의 문제, 향유한다는 것, 천국을 향유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
여기에 마법적 변화가 존재한다.
마법이 아닌 마법적 변화.

 

마법이란 이런 종류의 것이다. 가령 요술램프의 지니는 누가 닦아내었든지 간에 그 램프를 가진 자에게 복종한다.
사람들이 꿈꾸는 구원도 이런 식이다.
주문을 외우듯이, 램프를 주무르듯이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것의 어떠함으로 인하여 내게 주어질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내가 마법적 변화를 말할 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것은 도약, 질적인 변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다른 종류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마법적 변화는 수고한 자만이 빵을 먹으며,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빈곤한 자는 더 빈곤하게 되는 그런 원리다.

아주 단순한 말로 이렇다.
서울대에 가고 싶으면, 서울대에 들어갈 학생이 공부할 것처럼 공부해라.
즉, 공부하는 내가 되지 않으면, 서울대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 명제와 맞닿아 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에 들어갈 자처럼 살아라.
즉, 천국에 들어갈 내가 되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천국에 들어갈 내가 되기 전에는 천국에 들여 보내주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천국에 들어갈 내가 되지 않는다면, 천국을 주어도 그것을 천국으로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컴퓨터를 배우기 전에는 컴퓨터를 주어도 그것이 고철 이상이 아니듯이,
내게 아무리 희귀한 음반 CD를 구해준다 한 들 내가 그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게 냄비 받침 이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누림"의 문제, 향유의 문제다.
<서울대에 들어갈 사람이 되면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명제가 외적규정에 대한 것이라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명제는 내적규정에 대한 것이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다. 그것은 자기규정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네가 <수능 점수 350을 받으면 서울대에 합격시켜주겠다> 는 예는
서울대의 합격여부를 외적규정=수능점수 350 에 의해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와 상관 없이 수능점수(외부적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내가 찍어서 350을 맞았든, 풀어서 350을 맞았든, 불법을 저질렀든지 간에
350을 넘으면 서울대에 합격한다.

외적 규정은 내적 규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고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멋진 옷을 걸친다고 해서 내가 악한 사람이 된다거나 착한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적규정에 의해 결정되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천국도 그렇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기준을 만족시키면 들어갈 수 있다!>
이 명제는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다.
다만 실제로는 여기서 기준이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외적 규정이 아니라 내적 규정일 뿐이다.
내적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 말은 다음의 명제들에 담겨 있다.
나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되기 전에는 천국을 누릴 수 없다.
나 자신이 기뻐하는 자가 되기 전에는 천국을 누릴 수 없다.
나 자신이 겸손한 자가 되기 전에는 천국을 누릴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는가?
그렇다. 산상수훈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얻는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는 자에게는 천국을 허락하지 않겠다!> 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자에겐 천국을 허락해도 그는 그것을 천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천국은 그에게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지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향유되어지는 것,  침노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보는 것. 나 자신.
보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보는 것이 나이다.
내게 보이는 것들이 내 한계를 설정한다. -> 이 부분은 비티의 <논리철학논고>를 참조하라.

여기에서 외적 규정은 내적규정에 수반되지만,
내적규정에 의해 외적인 것이 마법적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능력, 곧 창조주의 흔적이다.
기뻐하는 자는 기뻐한다.
그 마음 속에 천국이 이루어 진 자는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다.

만일 외적 규정이 영향을 미친다면,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난 자는 예수보다 2천년 후에 태어난 우리 보다 천국에 가까이 있다.
예수를 곁에서 지켜봤던 베드로와 사도들은 우리보다 천국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내적규정에 의해 결정된다면,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난 자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 천국과 동일한 거리에 있다.
그리고 그 거리는 "믿음" 만큼의 거리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잔치를 기뻐하지 않는 자는 예수와 동시대에 있으며 함께 숨쉬고 같은 하늘 아래 옆자리에 앉았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천국잔치에 참예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를 믿는 자/예수의 잔치에 참예된 자는
이천년 후에 태어났다 할지라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 이 부분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후서> 동시대의 제자 부분을 참조하라. 
즉, 참예됨은 기쁨이라는 표징을 갖는다.
기쁜 자만이 참예되었고, 참예된 자만이 기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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